담배가게의 성자


51. 고통 받는 자가 누구인가?



방문객의 수가 적을 때는 마하라지는 격식을 갖추지 않고 친근한 방식으로 대화를 즐겼다. 그러나 그의 작은 다락방이 가득 차게 되면 그는 먼저 혹시 어떤 질문이 있는지부터 물었다. 그러나 보통 그 물음에는 제한 조건이 따르는데, 그 질문이 이 세상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관한 것과는 연관되지 않아야 하는 것이었다.


짐작할 수 있다시피 이러한 제한 조건은 단지 시간을 낭비하는 결과만을 야기하는 피상적이고 진지하지 못한 질문들을 멀리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복잡한 개인적 문제들에 대해서는 묻지 않아야 된다고 알고 있었다. 그러한 문제에 관하여 마하라지는, 자신은 남의 고통을 달래주거나 기적을 일으켜 문제를 해결해 주는 사람이 아니라고 퉁명스럽게 잘라 말하곤 했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왜 사람이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물어 보았다. 도대체 왜 불행이 존재하는가? 마하라지는 잠시 동안 꼼짝 않고 앉아 있다가 부드럽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람이 경험하는 모든 감정이나 느낌은 한결같이 의식의 움직임일 뿐입니다. 사람이 슬픔이나 불행을 느낀다는 것은 그때의 사건이 그 순간에 필요하다고 느껴지는 필요성의 부족함을 만족시켜 주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어떤 개체에게는 슬픔을 가져오는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행복을 주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그 사람이 자신에게 지금 필요한 것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어떤 때는 불행을 가져왔던 일이 다른 때는 행복을 가져다 줄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행복이나 불행, 즐거움이나 고통을 경험한다고 생각할 때에 거기에 관련된 요소는 무엇일까요? 첫째로는 반드시 의식이 있어야 하고, 둘째로는 반드시 어떤 결핍감을 느끼는 경험의 주체, 즉 사람이 있어야 하며, 셋째로는 시공간상에서의 사건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건의 발생이나 결핍감을 지닌 어떤 사람의 존재가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만약 의식이 없다면 그는 그 사건이나 또는 그 사건의 영향에 대해서 염려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의식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요소이며 행위자인 것입니다! 


진실로 "나의 참 본성"은 "내가 존재 한다" 는 인식이 생기기 전까지는 자신의 존재조차 알지 못합니다. 그 본래의 상태에 있어서는 어떤 필요도 결핍도, 희망, 소망, 야망의 가능성도 없으며 즐거움이나 고통의 가능성도 당연히 없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육체와 함께 생겨난 것입니다. 존재에 대한 인식이 생겨나고 나서도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의식하는 존재 그 자체-"내가 존재 한다"는 것 -이것은 내가 이것으로 존재한다거나 저것으로 존재한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입니다. 단지 의식이 스스로의 외적 형태와 동일시하게 되고 나서야 관념적 실재가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실재는 오로지 개념에 불과하며 독자적인 존재 형태는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의식이 발현될 때 시공간의 개념이 생겨나며, 시공간이 없고서는 현상이 감지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시현된 현상이 감각적으로 인지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부피를 차지하고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공간의 개념이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현상은 일정 시간 동안의 사건으로 지속되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시간의 개념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행복과 불행, 그리고 모든 상호 연관된 양극단의 반대 개념들은 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그것들이 그럴 수 없는 까닭은 그것들이 단지 시공간상에서의 개념적 대상화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양극단의 반대 개념들이 어느 순간 겹치게 되면 서로를 상쇄시키고 균형을 회복할 것입니다.


절대적인 우리의 본성(시공간을 차지하지 않으며, 제한되지 않으며, 어떤 속성이나 정체성도 전혀 없는 순수한 존재)은 고통이나 즐거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단지 대상(객체)만이 어떤 종류의 경험을 할 수 있으며, 우리의 본성은 대상화된 객관성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분리된 별개의 개체들로 드러나 보이는 것은 현시된 현상으로서, 시간의 제한을 받으며 크기가 유한하고 감각을 통해 인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통을 당하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를 분리된 객체로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그것 하나만은 이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되돌아가 원래의 온전함의 상태, 당신이 태어나기 이전의 상태에 머물도록 하십시오. 거기에는 "나는 존재 한다"는 인식조차 없으며 따라서 어떤 종류의 필요도 결핍도 없으니, 순수한 깨어 있음 속에서 환상을 환상으로 순간적인 것을 순간적인 것으로 알아차리자마자 모든 고통은 끝나게 될 것입니다. 


일단 환상과 순간적인 현상들이 본질적으로 시공간이라는 개념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당신의 참모습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될 것입니다. 고통을 겪는 것은 당신이 자기 자신으로 생각해 왔던 관념적 실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당신은 온전한 참된 성품으로 깨어날 것이며 그 참된 성품에는 거룩함과 고통의 치유가 드러나지 않게 내재되어 있을 것입니다.


결론으로서 마하라지는 "의사들이 내게 부과한 지독한 병" 에 관해 언급하였다.


M : 암이라는 병명을 듣기만 해도 환자는 충격을 받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의 반응은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누가 아프고 있는 것인가?" 분명히 태어난 것은 주어진 시간이 지나면 "죽어야" 합니다. 적당한 기간이 자나면 이 육체라는 기구를 이루고 있던 "원소"들의 작동이 나빠지고, 급기야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되면 “죽었다"고 판정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구 안에 있던 의식은 해방되어 우주에 골고루 편재하는 의식으로 영원히 잠겨 들게 됩니다. 그러면 "나" 는 어떻게 될까요? "나"라는 것은 있지도 않았고 또 있을 수도 없습니다. 반대로 "나" 는 항상적인 존재가 될 것이며, "죽음"의 순간은 마지막으로 이 기구를 감각적으로 인지하는 최고의 환희의 순간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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